시, 수필, 소설

김솜 - 커피, 애프터 이펙트

김잿솜 2022. 4. 12.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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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에서 물 맛이 난다. 커피 향 물, 커피 특유의 쓴 맛과 산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내가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다. 어린 내 눈에 어른들의 음료로 보였던 커피, 그것을 어머니 몰래 입에 대며 느낀 감정은 ‘어른들은 이렇게 쓴 음료를 대체 왜 마시는 거지?’였다. 그랬던 내가 이젠 커피를 물 마냥 홀짝홀짝 마시고 있다. 물 같은 것이 아니라 이 커피에서는 정말 물 맛이 난다. 혹시 정말 물은 아닐까 컵을 쳐다본다. 늘 마시던 색 - 얼음이 조금 녹아 약간 연해진 - 사무실 건물 1층 카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이다. 이건 분명 물이 아니다. 그저 내게 너무 익숙해진 맛과 향의 커피일 뿐이다.

 

평소라면 찾지 않을 편의점 캔 커피를 사 왔다. 그것도 설탕이 잔뜩 들어가 단 맛밖에 안나는 라떼로 말이다. 그렇게라도 커피에서 색다름을 느껴보고 싶었다. 사실 카페인이 필요했다. 물처럼 넘어가지 않는 색다른 카페인, 그 결과물이 천이백 원 가량의 캔커피이다. 뒷면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어린이, 임산부, 카페인 민감자는 섭취에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카페인 민감자가 아니다. 임산부는 더더욱 아니다. 그건 별로 특별한 사실이 아니다. 다만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는 사실만이 나를 슬프게 한다. 간편하게 만들어진 캔을 따 내용물을 맛본다. 어떠한 커피의 맛도, 향도, 산미도 없이 그저 달콤할 뿐이지만 이것대로 나쁘지 않다. 쓰디쓴 에스프레소보다는 캔커피의 달콤한 맛이 어린 나의 기대 속 커피의 맛과 더 비슷했으니까.

 

그렇다면 쓴 커피를 물처럼 마시고, 일주일에 두어 번은 알코올에 기대어 휘청이는 나는 과연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절 정도는 맞는 말이다. 지갑 어느 칸에 쑤셔 넣어져 있는 신분증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덕분에 어린 시절 꿈꾸던 성인의 자유를 얻었다. 필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나, 갓 성인이 된 나의 객기 속에 그 당연하다시피 한 법칙은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카드값과 보험료, 사회적 명망과 경력 따위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책임을 가르쳐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금도 그런 것들이 없다면 나는 당장 고삐 풀린 모습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슬프게도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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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보다는 조금 더 성장한 학생 시절, 내가 또래 중에서 영상 편집을 잘하는 편이라고 자만한 적 있다. 당시 나는 나이가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당장 학교 대신 사무실에서 실무자들과 일하고 싶었고, 그 결과물들로 경력을 만들어나가고 싶었다.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고 자만했기에, 당연 그래야만 한다는 다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학생의 본분을 먼저 다하라’라는 족쇄 같은 조언 속에서, 나는 하루빨리 어른이 되어야겠다며 투덜거리고는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건대 그것은 족쇄가 아닌 보호구였다. 어른들은 정말 능력 있는 아이에게 ‘학생의 본분’이라는 조언 대신 당장이라도 자리를 마련할 터이다. 적어도 내가 봐온 세상 사람들이란 그런 존재다. 어른들은 책임의 무게를 안다. 또한 능력이 있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음도 안다. 그들이 보기에 그때의 나에겐 무게를 버틸 정도의 능력이 없었을 뿐이다.

 

지금은 영상과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정말 우연히 영상 편집 프로그램의 하나인 [애프터 이펙트]를 다루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어릴 땐 그토록 열정을 태우며 즐겁게 했던 작업이, 이제는 아메리카노와 캔커피를 물 마시듯 식도에 꽂아 넣으며 버티듯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밤을 지새우며 꺼질락 말락 하는 희미한 가로등이 된 지금의 모습이 과연 참된 어른의 모습인가. 반딧불이같이 빛나던 어린 열정은 어디로 갔는가. 한편으로 어른들이 지켜주었던 것은 나의 무능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