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SENS / The Anecdote (2015)
첫 앨범 리뷰로 어떤 앨범을 고를지 많이 고민했다.
최근 많이 듣는 <선인장화>, <UGRS>, <그물,덫,발사대기,포획> 이나
힙합 명반 하면 꼽히는 <누명>, <24:26>, <Lifes like> 등이 후보로 있었다.
그래도 역시 처음은 <The Anecdote> 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첫 글을 적는다.
소개
발매 / 2015.08.27
장르 / 힙합
러닝타임 / 38:38
<The Anecdote>는 2015년 08월 발매된 E SENSE(이하 이센스)의 정규 1집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첫 옥중 앨범이기도 하다.
이 앨범의 화려한 수상 내역이나 파급력 등은 이미 유명하니, 바로 개인 평으로 넘어가볼까 한다.
말 안해도 모두 알지 않는가, 한국 힙합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그 '에넥도트' 이다.
트랙
<The Anecdote>는 총 10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사위
야, 돈 많고 잘나가면 장땡이야. 니가 뭘 하든 굶으면 의미없어. - <주사위 中>
학창시절 장래희망에 관한 에피소드를 수필처럼 적어낸 트랙이다.
3개의 벌스가 진행되는 동안 누구나 해봤을 법한 진로에 대한 고민, 황금 만능주의 현실, 이센스가 처한 상황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이센스는 '수업시간' 이 던진 '꿈이 뭐냔 질문'을 통해 교실, 세상,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게 된다.
대충 눈치껏 꿈 아닌 꿈을 적어내는 아이들과 돈이면 전부 해결되는 세상, 그걸 솔직하게 적어내는 아이, 돈 때문에 슬퍼하는 엄마를 통해 그는 한가지 결론을 내린다.
장래희망은, 나아가 인생은 결국 주사위 게임이며 돈이 많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이는 노래의 훅(Hook) 부분에 솔직하게 드러난다.
<Hook>
야, 돈 많고 잘나가면 장땡이야.
니가 뭘 하든 굶으면 의미없어.
야, 다 주사위 게임이야.
그럼 바닥에 처박던지 아님 위로 던져.
아직도 돌고 있어.
아직도 돌고 있어.
아직도 돌고 있어.
아직도 돌고 있어.
A-G-E
돈 보다 중요한 거 얻는 방법? 없어보고 나서 따지는게 순서가 맞어. - <A-G-E 中>
이센스의 예민한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이 담긴 트랙이다.
그는 사회의 여러 모순적인 요소를 나열하며 현시대를 비판하고 있다.
친구는 결국 뒷통수를 치거나 시스템의 펫,
같은 세대가 서로 지잡대라며 욕하는 노예같은 모습
눈에 띄는 사람을 미워하면서도 평범하기는 싫어서 쫒는 유행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자기계발서
티비 나오는 스님, 어디로 사라지는지 모를 교회 헌금
사회의 모순점을 구체적으로 짚어내는 과정에서 이센스 특유의 예민함이 돋보인다.
Writer's block
I got the writer's block, so come to my block. - <Writer's block 中>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봤을 Writer's block (글 쓰는 것이 막히는 상황)에 대한 트랙이다.
마치 일기를 들여다보는 듯한 현장의 재현과 그 속에서 느껴지는 이센스가 느낀 익숙함, 권태감,
밝은 멜로디에서 만들어지는 편안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Next Level
우리 이름 첫 단독 공연 관객 1200, WOW. - <Next Level 中>
이센스가 랩을 시작하고 슈프림팀으로 성공하기 까지의 서사가 담긴 트랙이다.
첫 번째 벌스에는 고등학교 자퇴 후 지역 랩 컴퍼티션에서 우승하여 본격적으로 힙합 씬에 뛰어드는 과정,
두 번째 벌스에는 서울 대회와 클럽 공연을 돌며 래퍼로서 커가는 과정,
세 번째 벌스에는 틀어진 회사 계약으로 인한 굶주림과 슈프림 팀으로 성공하는 과정이 담겨있다.
인상적인 부분은 이센스의 성장을 그가 살아오며 마주친 인연들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이센스가 처음 힙합씬에 들어오며 만난 Minos,
심사위원으로 만난 MC Meta와 그 대회에서 만난 화나, 더콰이엇,
서울로 활동 반경이 커지며 만난 팔로알토, 딥플로우, Simon D 등
그가 함께한 인연들을 위주로 성장기를 풀어내고 있다.
삐끗
이 바닥 시작부터 삐끗. - <삐끗 中>
<A-G-E>가 시대를 비판한 트랙이라면, <삐끗>은 연예계를 콕 집어 비판하는 트랙이다.
유명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이들과 실제로 그렇게 해야만 수지타산이 맞는 현실,
까보면 전부 금수저인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람들,
이센스는 당장 계약에 필요한 돈을 보며 물질주의에 대한 생각을 굳게 다진다.
10.18.14
씨발 너네들 음반 구라야 전부 다. 멜론 1위 했던데? 어, Good job. -<10.18.14 中>
언뜻 <삐끗>의 연장선으로 보이는 이 트랙은, 아메바 컬쳐의 대표 개코를 향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센스가 마약 사범이 되면서 터진 개코-이센스 갈등과 이후 컨트롤 디스전 등을 잇는 트랙으로 볼 수 있다.
The Anecdote
아들과 딸들의 아들과 딸들을 본다면. - <The Anecdote 中>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겪어온 불행을 되짚어보는 트랙이다.
'1996년 아버지를 잃은 아이' 로 시작하는 첫 벌스에서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재와 슬픔이 스며든 일상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단어 없이 명확한 상황과 구체적 진술만으로 비극에 빠진 가족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첫 벌스가 끝나고 나오는 훅은 '난 아들, 아빠의 아들.' 로 시작한다.
아버지의 부재로부터 오는 그리움이 담겨있는 느낌이다.
두 번째 벌스는 어린 시절과 달라진 인지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도시락 반찬으로 어머니를 조르고 선생님꼐 편모가정임을 밝히지도 못하는 아이와 그 시절 가정의 부담과 책임을 대신 떠맡아준 어머니와 두 누나를 회고하며 부끄러움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첫 벌스와는 다르게 훅이 '난 아들, 엄마의 아들.'로 시작한다.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남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는 느낌이다.
마지막 벌스에서는 아버지의 부재라는 구체적 현실과 가정에 대한 주관적 인식이 합쳐져 '아들' 이센스의 소망을 만들어낸다.
딱 한번만이라도 아버지를 다시 보고싶다는 그리움과, 이제는 각자의 삶을 잘 살아가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합쳐진 그런 소망말이다.
마지막 훅은 '난 아들, 엄마와 아빠의 아들.' 로 시작한다.
비극적 현실을 이겨내고 그리움과 슬픈 상황을 포용하는 모습니다.
Back in time
경산 촌놈 더 티 내 안 감추네. 빡빡이 가짜 신발 침발라서 닦던 애. - <Back in time 中>
성인이 된 이센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담아낸 트랙이다.
'경산 촌놈'으로서의 정체성과 공사판에서 밥벌이를 하며 한 다짐, 노동과 돈에 대한 생각 등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이센스의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신념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사유되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Tick Tock
이런 빌어먹을, 미쳐가는게 느껴지네. 느껴지네. 인간들이네... - <Tick Tock 中>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 이센스가 다시금 세상을 바라보는 트랙이다.
세상은 여전히 생존을 최우선으로 두는 이센스의 말을 농담처럼 여기고, 사람들은 돈 앞에 자존심을 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가사의 공격적인 어투는 마치 이들을 비난하는 것 같지만, 이센스의 이런 분노는 연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앨범의 유일한 피쳐링으로 Kim Ximya(김심야)가 참여했는데, 앨범의 서사가 마무리 되는 과정에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을 잘 살려주었다.
Unknown Verse
내 걷는 속도론 닿지 못할 곳에 놓여진게 내가 찾는 보물일까, 보물이란건 있나? - <Unknown Verse 中>
앨범에서 던진 주제를 하나씩 주워담는 아웃트로 트랙이다.
<The Anecdote> 앨범의 서사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며 진행되는데, 이렇게 뒤죽박죽인 순서 속에서 던져놓은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들을 자신의 과거 믹스테잎 <New blood, Rapper Vol.1>의 가사들을 인용하여 정리한다.
이센스의 앨범이니만큼 서사를 중점으로 트랙을 해석하긴 했지만, <Unknown Verse>는 특히 사운드도 인상적이다.
킥과 스네어의 넓은 공간감이 만드는 몽환적이고 편안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앨범을 감상하며...
<The Anecdote>에는 집중해서 감상할 포인트가 정말 많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변칙적인 서사, 이센스 특유의 쫀득한 플로우, 힙합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비트 등.
그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이센스가 청자를 설득하는 과정'이다.
이센스는 <The Anecdote>의 가사를 마치 수필처럼 적어나간다.
솔직하고 담백하게, 객관적 상황과 그 속에서 느낀 주관을 늘어놓는다.
이 앨범의 설득력은 바로 이 솔직함에 있다.
그는 스스로의 삐뚤어진 시선마저 과감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솔직함이 객관적으로 나열된 상황 사이를 연결하여 보이지 않던 감정선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개인적으로 트랙 'The Anecdote'를 제일 좋아하는데, 바로 이런 솔직함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트랙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부재와 가족의 비애를 솔직하게 담아내되, 단순히 주관적인 감정에 치우쳐서 설명하지 않는다.
'3545 번호', '달그락 거리는 설거지 소리' 등 객관적 상황과 이에 대한 주관적 시선이 어우러저 하나의 복잡한 감정선을 만들어낸다.
총평
한국 힙합 최고의 명반을 꼽으라 한다면 나는 반드시 이 앨범을 말 할 것이다.
이센스가 <The Anecdote>에서 들려준 이야기는 오직 이센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내 힘든 시절에 많은 위로를 준 앨범이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다가왔으면 한다.
●●●●◐ / 4.5
마치며
첫 앨범 리뷰가 끝났다.
트랙 하나하나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하고싶은 말을 다 못한 것 같기도 하다.
무엇부터 써야할 지 몰라 많이 해매이기도 했고,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 많다.
다음 앨범이 무엇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땐 더 정돈된 리뷰를 적어야겠다는 생각이다.